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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는 시각보다 청각이 먼저 깨어납니다.

샤워기의 물줄기가 공기를 갈라내듯 떨어지고, 바닥에서 잔잔하게 튕겨 오르는 미세한 울림은 공간을 천천히 적셔냅니다. 벽면을 타고 스며드는 소리, 스팀과 함께 부드럽게 흩어지는 잔향, 거울에 얇게 맺혀가는 물기까지.

우리는 욕실을 깨끗함과 기능으로 정의하지만, 사실 이곳은 소리가 가장 풍부하게 움직이는 작은 무대입니다. 물이 만드는 소리의 결 하나만으로도 욕실은 익숙한 공간에서 감각적인 풍경으로 변합니다.


욕실

물줄기의 속도와 음색

샤워기의 분사 방식은 단순히 물의 형태가 아니라, 욕실이라는 공간에 흐르는 음색을 정합니다.

직수는 힘 있게 떨어지며 공간을 또렷하게 울리고, 에어가 섞인 분무형은 공기를 한 번 더 통과해 사뿐하게 흘러내립니다. 온도를 조금씩 높이거나 낮출 때마다 물방울의 밀도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울림은 미묘하게 바뀝니다.

같은 욕실에서도 물의 소리만으로 기분이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소리의 깊이를 조절하는 것은 결국 하루의 속도를 조절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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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바닥에서 부딪혀 생기는 잔향

욕실 자재는 물소리를 해석하는 표면입니다. 매끄러운 유광 타일은 소리를 또렷하게 반사해 샤워 소리를 선명하게 확장시키고, 매트한 스톤은 소리를 흡수하여 부드럽게 낮춰줍니다.

샤워기 아래 바닥의 경사가 깊지 않다면 물은 잠시 머물다 흐르고, 이 느린 이동은 욕실에 단정한 리듬을 남깁니다. 물이 바닥과 벽을 오가는 경로는 하나의 작은 악보처럼 고유한 흐름을 이루며, 욕실 전체의 분위기를 조용히 조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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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의 미묘함

샤워를 마치는 순간이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물줄기가 멎자마자 남는 잔향,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의 마지막 떨림, 타일 위에 남은 물기가 미끄러지며 내는 속삭임 같은 소리. 수건이 피부에 닿아 물기를 흡수하는 감촉까지도 음으로 변환되어 귀에 남습니다.

욕실은 소리가 울리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소리가 사라지는 공간입니다. 그 두 지점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짧은 정적은 쉼표처럼 여운을 남기고, 그 여운은 샤워보다 오래 머뭅니다.


욕실

물소리를 위한 공간의 설계

잔잔한 소리를 원한다면 질감이 살아 있는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작은 요철이 있는 타일은 소리를 분해해 부드럽게 만들고, 석재나 테라조는 물이 떨어질 때의 충격을 걸러내 잔향을 낮춥니다. 반대로 명료한 울림을 원한다면 유리면적을 넓히거나 샤워부스를 강조해 음의 반사를 키울 수 있습니다.

바닥의 경사, 벽면의 높이, 샤워기의 방향은 모두 소리를 설계하는 요소가 되며, 욕실은 이 설계가 모여 완성되는 하나의 악기처럼 작동합니다.


욕실에서 물소리는 하루의 속도를 늦춥니다.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 되고, 여운처럼 남은 음은 샤워 이후에도 한동안 귀에 머뭅니다.

울림과 잔향이 차분하게 이어지는 욕실은 스스로를 정리하는 장소이며, 그 작은 소리는 하루의 끝과 시작을 동시에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물소리와 잔향이 머무는 욕실
물소리와 잔향이 머무는 욕실